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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봄날의 롤링 스톤스를 좋아하세요?

봄이 와서 그런지 몸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습니다! 봄은 평등합니다. 젊은이들만 낭만과 열정을 소비하는 계절이 아닌 거죠. 벌써 밴드 결성 50주년을 맞은 롤링 스톤스의 보컬이자 리더인 믹 재거가 트위터에 "can't wait" to play the festival이라는 멘션을 남겼다고 하네요. 믹 재거가 몸을 들썩이는 이유는 영국의 대표적인 뮤직 페스티벌 중 하나인 글래스톤베리에 롤링 스톤스가 나서기 때문이죠. 롤링 스톤스는 그들의 공식 웹사이트에 6월29일 무대에 설 것이라고 팬들에게 알렸습니다.




밴드 결성 50주년이라는 시의성 때문이든 글래스톤베리 공연 소식 때문이든 이 따스하고 밝은 봄날과 롤링 스톤스를 같이 떠올리는 건 어색합니다. 좀 과격하게 표현하자면 이들은 음습한 '양아치'이기 때문이죠. 왜  양아치라고 생각하는지 천천히 썰을 풀어보죠. 


롤링 스톤스 음악은 불길하고 퇴폐적입니다.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가 싶어서 음악 좀 듣는다는 분들에게 물어봤습니다. "봄날의 롤링 스톤스를 좋아하십니까?" 


록, 팝, 하우스, 클래식 등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형님 왈  “내가 비비킹이나 척 베리도 집에서 종종 틀고 즐겨듣는데 롤링 스톤스는 안 듣게 되더라” 

 

목하 열애중인 또 다른 형님은 “비틀즈 CD는 여친한테 빌려준 적이 있는데 롤링 스톤스는 권하기 좀 그렇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표본집단이 매우 협소하긴 하나 저의 직관적인 인구통계학적 조사방법에 따르면 롤링 스톤스는 봄에 듣기 쫌 그런 음악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몇몇 곡들을 예로 들어볼게요. 가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운드 자체가 너저분합니다. 'Sympathy for the devil'이란 노래를 한 번 틀어보세요. 악마적인 외침과 들뜬 코러스, 원시부족의 난장판 파티가 따로 없습니다. 롤링 스톤스 노래들은 대개 끈적끈적합니다. 이들이 블루스에 헌신한 음악여정을 펼쳐왔기 때문이죠. 롤링 스톤스는 존경하는 뮤지션으로 블루스 명인 머디 워터스를 꼽곤 했습니다. 애초에 깔끔한 음악과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죠. 





그렇다손 치더라도 똑같이 블루스에 기반을 둔 음악을 했던 에릭 클랩튼을 생각하면 그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어쿠스틱 버전의 'Layla', 'Wonderful tonight', 'Change the world', 'Blue eyes blue' 같이 아름다운 발라드를 불러 제꼈던 에릭 클랩튼을 보세요. 참 젠틀하고 낭만적이지 않나요. 롤링 스톤스도 부드럽고 낭만적인 팝 성향의 노래들을 만들었다면 팬층이 훨씬 넓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멜로디도 매끄럽게 잘 뽑아내는 밴드니까요.


'Angie'와 'As tears go by'의 기가막힌 선율감각이 그것을 증명하고도 남죠. 하지만 롤링 스톤스는 형식적인 아름다움에 천착하기 보다는 그것을 배격하고 록의 야수성, 원시성, 반항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동시대 라이벌이자 최고 밴드인 비틀즈와는 또다른 그들만의 세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죠. 부드러운 음악 낭만적인 음악,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것이 맞습니다.





관습적인 것, 얌전한 것으로부터의 탈피는 '양아치'의 특권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런 노선을 취한 '양아치' 롤링 스톤스는 아주 오래 전부터 고차원적인 '쿨'을 실천한 장본인이라 할 수 있죠. 이들은 흔히 비틀즈와 비교되어 악동의 이미지를 굳혀 왔는데요. 사실 출신성분으로만 보자면 롤링 스톤스가 더 나은 집안 아이들이었습니다. 


멤버 대부분이 소위 있는 집 아이들이었고 특히 믹 재거는 런던대학 경제학부 출신의 나름 엘리트입니다. 결코 막 돼먹은 아이들을 자처할 종자가 아닌 거죠. 좀 사는 집에 번듯한 대학 나온 애가 갑자기 삐딱해진 이유는 뭘까요. 비틀즈와 똑같이 해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일찌감치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이들도 활동 초기에는 비틀즈처럼 말끔한 정장을 차려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신통치 않았죠. 이에 매니저 앤드류 올드햄이 내놓은 처방은 모범생 모드와는 정반대로 '막가파'로 나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마약을 하면서 느끼는 환각상태를 노랫말에 담고, 외설적인 앨범 커버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롤링 스톤스가 자신들의 생물학적 남성성을 당당히 드러낸 <Sticky Fingers> 앨범 커버입니다. 끈적한 손가락이라... 아는 사람만 아는 걸로. 궁금하면 이 앨범 커버를 디자인한 앤디 워홀에게 물어보는 걸로.

 

 

 

이들이 막가파라는 건 이 앨범이 나오기 전 일어난 알타몬트의 비극을 상기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1969년 12월 알타몬트 공연에서 롤링 스톤스는 무료공연을 개최하면서 관람질서 유지를 위해 할리 데이비슨을 애용하시는 모터 사이클족 '지옥의 천사들'(Hell's angels)을 고용했습니다. 문제는 이 지옥의 천사분들이 자기 임무에 너무 충실한 나머지 과도한 폭력을 휘둘렀다는 점입니다. 많은 관객들이 그들에게 몽둥이질을 당하고 급기야 흑인청년 하나가 칼에 찔려 죽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그렇지만 롤링 스톤스는 알타몬트의 충격에 움츠러들지 않았습니다. 대중과 평단은 이후 나온 앨범인 <Sticky Fingers>에서 일말의 반성을 기대했겠지만 이 작품은 비웃기라도 하듯 전혀 건전하지 않습니다. 여성을 비하하는 제목인 'Bitch'라는 곡부터 마약을 암시하는 'Brown sugar'와 'Sister morphine'이 이 앨범에 포진해있습니다. 미국 최고의 음악평론잡지인 롤링 스톤은 이 앨범을 두고 “모든 사람을 당황시킬 방법을 찾은, 화려하리 만큼 자신만만한 앨범의 위력을 업고 그들은 70년대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고 말했습니다.  

 

끈적한 손가락 얘기는 그만하고 아까 말했던 비틀즈와의 이미지 차별화 노선으로 돌아와서 얘기 계속하죠. 어떤 이데올로기에 기댄 거창한 방향 선회가 아니라 구차한(?) 생존욕구 때문에 반항의 전도사가 되었다는 게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한데요. 그래도 이후로 한결같은 모습을 보여줬다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코 일회성 전략이 아니었고 반항은 이들의 정체성 그 자체가 되었죠 . 이미지와 탄탄한 음악이 같이 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록이란 무엇을 이야기하는 음악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저는 모범답안으로 롤링 스톤스를 말하겠습니다. 록을 젊은 음악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 세상에 해답을 제시하진 못할지언정 이 장르에는 얼마간 고정된 양식과 관습을 깨뜨리려는 정신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죠. 물론 롤링 스톤스가 거창하게 사랑, 평등, 자유 이런 추상적인 개념을 노래했던 밴드는 아닙니다. 그저 아주 솔직하게 '지금 이 시점'의 불만과 감정을 표출하는 데 열심이었죠. 


롤링 스톤스는 어떻게 해도 넘어오지 않는 여자들을 원망하고(Heart of stone), 오만가지 잡스런 상황이 불만족스런 상태(Satisfaction)를 노래했습니다. 자신을 쳐다보지도 않던 여자가 지금은 자신에게 잡혀산다며 우쭐대는 치기어린 감정(Under my thumb)을 용감하게 내뱉기도 했죠.


남들이 반전과 평화를 얘기할 때에도 주눅들지 않고 자기 얘기를 했어요. 대의를 위해 희생하진 않았지만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얘기를 마구 휘둘러대는 것, 그 자체로 록의 본질이라 할 자유를 실천한 멋진 양아치라고 생각합니다. 예의차리고 할 말 못하는, 생각만해도 질식사할 것 같이 다림질된 일상 너머에서 저를 유혹하는 롤링 스톤스의 손짓은 구원의 손길일까요 아니면 사악한 악마의 꾐일까요.


따뜻한 봄날, 사무실에 틀어박혀서 자기 감정, 하고 싶은 말 꼭꼭 눌러둔 채 답답한 한숨만 내쉬고 있나요? 그렇다면 들어보세요. 봄남에 롤링 스톤스, 뭐 그렇게 나쁘지 않습니다. 뽀너스로 아래 사진은 봄햇살을 닮은 믹 재거 형님의 환한 미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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