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출신 학자인 헨리 바키 우드로윌슨센터 중동지역 국장은 미국 워싱턴포스트와 인터뷰에서 “현대사에 이런 제도는 없었다”고 말했다. 16일(현지시간) 터키에서 국민투표에 부쳐진 대통령 권한 강화 개헌안을 두고 한 말이다.
개헌안은 의원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지만 의회, 사법부 권한을 대폭 축소해 사실상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1인 장기 독재체제를 만들려는 시도라고 비판받는다. 지난달만 해도 개헌 찬성이 근소하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지만 여론은 갈수록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슬람을 전면에 내세우며 유럽국과 갈등도 마다하지 않는 에르도안은 술탄의 꿈을 이룰 수 있을까.
개헌이 확정되면 총리직은 폐지되고 대통령은 부통령과 장관을 의회 승인 없이 임명할 수 있다. 대통령령으로 법률을 공포할 수 있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거나 의회를 해산할 권리도 생긴다. 임기 5년의 대통령 중임제는 그대로 유지된다. 하지만 개헌안은 에르도안의 이전 임기는 이 계산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2019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에르도안은 개헌 뒤 다시 대선에 출마하면 2029년까지 집권할 수 있다.
에르도안 맞춤형 개헌안 내용은 여기저기서 보인다. 현행 헌법 8조는 대통령 후보가 4년제 대졸자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개헌안은 전문대 졸업자로 조정했다. 에르도안은 2년제 전문대학을 졸업했으며 4년제대학 졸업장은 위조됐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개헌안은 법원 고위직과 대학총장 인사권도 대통령 권한에 포함시켰다. 에르도안 정부는 사법부와 교육계에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 지지 세력이 퍼져 있다고 본다. 에르도안 정부는 지난해 7월 쿠데타도 귈렌을 배후로 지목했다. 이후 군인들은 물론 귈렌 지지세력으로 간주되는 판사, 경찰, 정부 공무원들까지 무더기로 징계하고 파면시켰다.
에르도안은 2003년 총리가 돼 지금까지 터키를 통치해오고 있다. 2007년, 2011년 총선을 거치면서도 총리직을 유지했다. 하지만 총리직 4연임 금지 규정에 가로막히자 임기 5년 단임제의 대통령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2014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재집권했다.
오랜 통치에도 지지세력이 탄탄한 건 경제안정 덕분이다. 에르도안 총리 재임 초기 5년간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7%에 달했다. 2011년 성장률은 10%를 넘겼으며 고질적인 문제로 지적된 인플레이션도 안정세로 돌아섰다. 국민들의 지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지난해 쿠데타 진압 이후에는 지지율이 70%에 육박했다.
경제성장과 국민 지지를 등에 업고 에르도안은 더욱 과감하게 자기 색깔을 냈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 이후 지켜온 정교분리의 세속주의 전통을 버리고 이슬람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공공장소와 대학 등에서 히잡 착용을 금지하던 것을 2008년부터 단계적으로 폐지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에르도안은 지난해 5월 “터키의 무슬림 가정은 피임해서는 안 된다”면서 “여성이 인구 감소에 책임져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에르도안 정부의 비민주성을 문제삼는 유럽국과 터키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고 있다. 터키는 2005년부터 유럽연합(EU) 가입협상을 벌여오고 있다. EU는 대통령에게 권한이 집중된 개헌안이 비민주적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에르도안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EU가입 여부는 국민투표에 부치겠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터키를 완충지로 삼아 난민위기를 조절하고 있는 유럽국으로서는 터키의 개헌 국민투표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터키 정부는 유세과정에서 유럽국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정부는 개헌안 통과를 장담할 수 없게 되자 독일과 네덜란드에 장관까지 보내 재외국민들의 찬성 투표를 독려하려고 했다. 하지만 독일, 네덜란드 정부가 이들의 입국을 허락하지 않고 개헌 찬성집회도 무산시켰다. 에르도안은 “나치같은 행태”라며 직접 양국 정부를 비난했다.
개헌 국민투표 결과는 예측하기 어렵다.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는 최근 실시된 28개 여론조사결과를 종합해 치열한 접전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12개 여론조사 결과에서는 찬성이 앞섰지만 8개 여론 조사에서는 반대가 더 많았다. 지난 5일 친정부 여론조사기관 게나르 조사에서도 찬성 비율은 54%에 그쳤다.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되자 개헌찬성파들은 대통령제 띄우기에 나섰다. 제밀 에르템 대통령 경제고문은 “터키가 의원내각제 탓에 발전하지 못했다”면서 한국을 대통령제의 모범국가로 꼽기까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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