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40년 맞은 아르헨티나 5월광장 어머니회..."과거사 밝히는 싸움은 계속될 것"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 시절에 자식을 납치당하거나 강제로 입양보내야 했던 이들의 모임인 ‘5월 광장 어머니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 카사로사다 대통령궁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1977년 자녀를 찾아달라는 여성 14명이 항의를 한 것을 시작으로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FP연합뉴스

아르헨티나의 군사독재 시절에 자식을 납치당하거나 강제로 입양보내야 했던 이들의 모임인 ‘5월 광장 어머니회’가 창립 40주년을 맞은 지난달 30일(현지시간) 부에노스아이레스 카사로사다 대통령궁 앞에서 집회를 하고 있다. 1977년 자녀를 찾아달라는 여성 14명이 항의를 한 것을 시작으로 매주 목요일 이곳에서 집회가 열리고 있다. 부에노스아이레스|AFP연합뉴스

아르헨티나 군부정권 희생자 가족들의 모임인 ‘5월광장 어머니회’가 진실규명을 요구하는 첫 집회를 연 지 지난달 30일로 40년이 됐다. 군사정권의 납치·살해에 자식을 빼앗긴 부모들은 정부의 위협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오랜 세월 싸워왔다. 하지만 40년이 지나도록 이들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최근 마우리시오 마크리 대통령이 희생자 숫자에 의문을 제기하는 등 진실규명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자 이제는 할머니가 된 어머니들이 역사를 바로 세우기 위한 싸움에 다시 나섰다.


1일(현지시간) 라나시온 등 아르헨티나 언론들은 어머니회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마누엘 벨그라노 장군 기마상 앞에서 4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과거사 진상규명을 거듭 촉구했다고 보도했다. 1976~1983년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의 군부독재정권 시절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숨지거나 실종된 사람들은 약 3만명으로 추산된다. 인권단체들을 이 시기 군부의 만행을 ‘더러운 전쟁’이라 부른다. 하지만 마크리는 이 규모가 부풀려진 것 아니냐고 의문을 제기했다. 단체 설립자 중 한 명인 노라 코르티나스는 마크리 정부가 희생자 규모를 줄이려 한다며 군부정권 시절의 기록을 공개하라고 요구했다.


5월광장은 카사로사다 대통령궁 앞 광장 이름이다. 40년 전, 군부에 자식을 납치당한 어머니 14명이 이 광장 주변을 돌며 항의시위를 했다. 이는 매주 목요일 광장에 나와 기저귀천으로 만든 흰색 스카프를 머리에 두르고 침묵시위하는 목요집회로 이어졌다. 어머니들이 모인 그해에 회원 3명이 납치됐지만 집회는 계속됐다.


1983년 민주정부가 세워지고 이후 군부정권 인사들이 줄줄이 법정에 섰지만, 군부의 범죄를 모두 밝혀내지는 못했다. 라울 알폰신, 카를로스 메넴 등이 이끈 이후의 정부들은 군부 인사들 처벌에 소극적이었다. 2003년 좌파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진상규명 작업은 탄력을 받았다. 이후 군부 인사 수백명에 대한 재판이 다시 열렸고 아르헨티나는 인권운동의 새로운 롤모델로 떠올랐다. 어머니회는 과거사를 밝히기 위한 투쟁의 성과를 자축하면서, 싸움을 계속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강제입양된 아이들을 찾기 위한 ‘5월광장 할머니회’도 있다. 군부는 지식인들과 반체제 인사들을 납치·살해했을뿐 아니라, 감옥에 갇힌 이들의 아이들을 멋대로 군인, 경찰관, 공무원 가정에 강제입양시켰다. 부모를 살해한 사람의 집에 입양된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가족을 빼앗긴 아이들이 5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1977년 이 아이들을 되찾아주자며 만들어진 것이 할머니회다.


정부는 납치와 학살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잡아뗐으나 1982년 10월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그랑부르 공원에서 400여구의 유골이 발견됐다. 정부가 340여개의 비밀 수용소를 짓고 고문을 자행한 것도 드러났다. 정부는 1991년 보상금을 제시했지만 어머니회 회원들은 자식들의 생명을 돈과 바꿀 수 없다며 거절했다. 어머니회와 할머니회는 정부의 추모시설 건립 제안도 반대했다. 자식들의 정신을 화석화시켜 돌 속에 가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에베 보나피니 회장은 30일 기념 집회에서 “죽음이 바로 옆을 스쳐갈 때에도 우리는 싸웠고 용기를 얻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