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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터키, 이제부턴 ‘에르도안 중심제’

국민투표로 대통령 권한 강화 개헌안이 통과된 16일(현지시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왼쪽 사진)이 이스탄불의 정의개발당 본부에서 승리선언을 하자 한 여성 지지자(오른쪽 아래 사진)가 환호하고 있다. 반면 이스탄불 광장에서는 개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항의시위를 했다.   이스탄불 | EPA·AFP연합뉴스

국민투표로 대통령 권한 강화 개헌안이 통과된 16일(현지시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왼쪽 사진)이 이스탄불의 정의개발당 본부에서 승리선언을 하자 한 여성 지지자(오른쪽 아래 사진)가 환호하고 있다. 반면 이스탄불 광장에서는 개헌에 반대하는 시민들이 모여 항의시위를 했다. 이스탄불 | EPA·AFP연합뉴스


아타튀르크가 가고 술탄이 들어섰다. 이슬람을 전면에 내세우며 장기 집권을 꿈꿔온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정부가 대통령 권한을 대폭 강화하는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6일(현지시간) 치러진 개헌안 국민투표에서 찬성이 51.4%로 반대 48.6%를 근소하게 앞섰다. ‘건국의 아버지(아타튀르크)’ 무스타파 케말이 1923년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국을 수립한 뒤 도입한 의원내각제는 근 100년 만에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게 됐다.


에르도안은 “오랜 세월 갈등을 불러온 통치 체제 문제를 해결한 역사적 결정”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도시, 젊은 세대들을 중심으로 반발 여론이 거세다. 에르도안의 권한 강화는 곧 이슬람 종교국가로의 회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번 투표는 터키의 미래를 놓고 세대 간, 지역 간 분열이 거세다는 점을 보여줬다. 이스탄불, 앙카라에서는 반대표가 더 많았다. 정치컨설팅업체 유라시아그룹 회장 이안 브레머는 “런던은 브렉시트에 반대했고 뉴욕, 로스앤젤레스, 샌프란시스코도 도널드 트럼프에게 반대했다”면서 세계가 더욱 분열되고 있다고 우려했다. 투표부정 의혹도 제기됐다. 제1야당인 공화인민당(CHP)은 선거관리위원회 날인이 없는 투표용지들이 나왔다며 전체 투표용지 60%의 재검표를 요청했다.


2003년 총리가 된 에르도안은 2014년 대통령으로 자리를 옮긴 뒤 대통령 권한을 야금야금 강화했다. 이번 개헌 덕에 최장 2029년까지 장기집권이 가능해졌다. 개헌을 성사시키려고 그는 무슬림의 환심을 사는 정책들을 내세워 케말의 세속주의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아시아와 유럽을 나누는 이스탄불 북부 보스포루스 해협 위로 대형 모스크를 짓게 하고 술에 높은 세금을 매겼다. 오스만튀르크 제국 시절에도 그리스정교회 관할지역으로 인정받았던 이스탄불 탁심광장에 지난 2월부터 모스크를 세우기로 한 것은 가장 상징적인 조치였다. 공공장소에서 히잡 착용을 금한 조치를 구시대의 유물로 규정하고 단계적으로 규제를 풀었다.


에르도안 정부를 비판하는 쪽에서 우려하는 대목은 종교적인 색채가 교육을 통해 더욱 강화될 것이라는 점이다. 지난 1월 생물교과서에는 진화론이 빠졌고, 역사교과서에서 케말 분량이 크게 줄었다. 지난해 7월 군 일각의 쿠데타 시도로 희생된 사람들을 순교자로 묘사한 사진을 교실에 걸어두고 에르도안을 영웅으로 추앙하는 교육을 강요한다며 교사들은 반발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에르도안의 철권통치를 견제할 제도적 장치가 사라진 점이다. 개헌안은 현행 550석인 의석수를 600석으로 늘리는 내용을 담았다. 대통령을 비롯해 부통령, 장관에 대한 수사를 개시하는 데 필요한 표는 360표로 늘어난다. 수사를 피하기 위해 대통령이 총선과 조기 대선을 요구할 수도 있다. 국회가 대통령 재판을 대법원에 요구하려면 의원 400명 이상이 동의해야 한다. 이 개헌안은 대통령이 판사와 대학총장을 임명할 권한까지 부여했다.


에르도안 정부는 지난해 7월 쿠데타 시도를 진압한 후 군인과 경찰, 판사 등 4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을 숙청하고 비판적인 언론까지 장악했지만 채 3%도 안되는 격차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반대 여론은 언제고 강하게 터져나올 수 있다. 투표결과가 공개된 직후 야당 당사에는 항의 시위대가 집결했다. 이집트에서 ‘아랍의 봄’ 뒤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무르시는 이슬람 세력을 등에 업고 ‘파라오 개헌’으로 알려진 권력 강화 개헌을 추진했다가 반발을 샀으며 끝내 쫓겨났다. 에르도안은 위기 때마다 시위를 강경진압하든 야당을 탄압하든 어떤 형태로든지 정치적 승부수를 둬 오히려 권력을 키웠다. 하지만 이번 개헌이 그에게 현대판 술탄의 영예와 힘을 안겨줄지, 부메랑으로 돌아올지를 예견하긴 힘들다. 유럽과의 관계도 악화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