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오웰은 1934년 발표한 소설 <버마 시절>에서 영국의 제국주의 그늘에 가려진 식민지 버마(현 미얀마)의 현실을 그렸다. 작품 속 원주민 의사 베라스와미와 치안판사 우 포 킨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대신, 영국의 힘을 빌려 권력을 잡고 이익을 챙기는 데만 급급하다. 오웰이 살아나 다시 미얀마를 소재로 글을 쓴다면 어떤 소설이 탄생할까.
30일로 아웅산 수지(사진)가 이끄는 미얀마 민주정부가 출범한 지 1년이 된다. 수지는 군부정권의 억압적인 통치체제를 극복하고 소수민족들을 아우르는 정치를 펼 것으로 기대됐지만 현실은 달랐다. 자신이 이끄는 정당인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의 정치적 입지를 확대하려고 군부와 협력하고,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등 인권에 눈감고 있다는 비난이 많다.
경제 형편도 크게 나아지지 않아 수지 정부에 대한 실망감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 난민 사태 속 빛바랜 민주정부
유엔인권이사회(UNHRC)는 지난 24일 미얀마 서부 라카인주에서 군과 경찰이 로힝자족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고 고문과 성폭행을 일삼는다는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국제조사단을 급파했다. 미얀마 군경은 지난해 10월 방글라데시 접경지대에서 무장괴한들의 경찰초소 습격 사건이 일어나자 이를 빌미로 대규모 군사작전에 나섰다.
수지의 침묵은 예견됐던 일이다. NLD는 2015년 11월 총선에서 상·하원 657석 중 59%인 390석을 차지해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여전히 상·하원 의석의 25%에 대한 지명권을 가진 군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국방부, 내무부 장관은 물론 국경경비대장까지 군 총사령관이 지명한다. 미얀마는 상원과 하원, 군부에서 각각 1명씩 3명의 대통령 후보를 낸 다음, 국회 표결로 대통령을 뽑는 간선제이기도 하다. 또한 배우자나 직계가족 중 외국 국적자가 있으면 대통령에 입후보할 수 없다는 헌법을 바꾸려면 군부 협조가 절대적이다.
군부는 인구의 약 70%를 차지하는 버마족과 90%로 인구 대다수를 차지하는 불교도들 편에서 로힝자 등 무슬림 소수민족을 학살·추방하고 있다.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자 난민은 30만명에 달한다. 미얀마 정부는 군부 때나 지금이나 이들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다. ‘인종청소’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지만 정부는 이런 주장을 일축해왔다.
1년여 전 총선 때 수지가 소수민족 후보자 출마를 막는다는 비판도 나왔지만 130여개 소수민족은 군부보다는 낫다며 그를 지지했다. 하지만 수지는 기대를 저버렸다. 지난 1월 양곤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이슬람 관련 행사는 불교 민족주의자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AFP통신은 “불교 국가인 미얀마에서 무슬림 탄압은 전에도 많았으나 지난해 3월 수지의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더욱 심각해졌다”고 전했다. 수지는 군부가 만든 헌법의 제한 규정 탓에 대통령이 되지 못한 대신 국가자문역 겸 외교장관을 맡고 있다. 권력을 쥐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직접 책임을 물을 수는 없는 기형적인 ‘대리통치’ 구조에서 소수민족과 난민들이 고스란히 희생을 당하고 있는 셈이다.
■ 한풀 꺾인 경제성장
정치범을 석방하고 NLD의 정당활동을 보장하는 등 적극적으로 체제 전환에 나섰던 테인 세인이 집권한 2011년부터 미얀마 경제는 빠르게 성장했다. 그해 1인당 명목 국내총생산(GDP)이 1000달러를 넘어 최빈국에서 벗어났다. 이후 GDP 성장률은 2012년 7.3%, 2013년 8.4%, 2014년 8.7%, 2015년 7.3%로 꾸준히 증가했다. 2015~2016 회계연도에 외국인이 미얀마에 투자한 돈도 94억달러(약 10조4600억원)에 달했다.
하지만 수지 정부가 들어선 이후 성장세가 오히려 한풀 꺾였다. 세계은행은 2016~2017 회계연도에 외국인 투자가 30% 줄고 GDP 성장률도 6.5%에 머문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국 기업들이 정부가 명확한 경제정책을 내놓을 때까지 투자를 유보했기 때문이다.
광물, 석유, 가스, 농산물 등 주로 천연자원에 의존하는 미얀마 경제에 가장 시급한 과제는 도로, 항만 등 인프라와 전력시설 확충이다. 하지만 정부와 의회 모두 국가채무를 늘리면 안된다는 입장이어서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백순 전 미얀마 대사는 “차관을 들여서라도 인프라 개발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데, 그런 측면에서 수지의 과감한 리더십이 부족해 보인다”고 지적했다.
인프라 건설과 소수민족 문제가 맞물리기도 한다. 정부가 북부 카친주의 이라와디강 수원에 밋소웅댐과 수력발전소를 지으려 하자, 지난해 이 지역 소수민족인 카친족은 17년간 이어져온 정전협정까지 깨뜨리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정부의 자원 착취가 계속되면서 불신이 쌓인 탓이다.
카친족은 이전부터 정부가 이 지역의 금과 비취 등 자원을 착취한다며 반발해왔다.
수지는 아버지인 건국영웅 아웅산 장군의 뜻을 이어받아 소수민족이 동등한 자치권을 누리는 연방제 형태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소수민족 권리를 보호해주는 대신 여전히 ‘버마족 민족주의’ 세력의 지지에 기대고 있어, 소수민족 문제와 얽힌 경제 난제들을 풀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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