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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로큰롤의 다른 이름, Chuck Berry Chapter 2

< 영화 "Back To The Future" 스틸 이미지 >

1985년 개봉한 영화 "Back To The Future"에는 Michael J. Fox가 호들갑스럽게 기타 연주를 해 관객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1955년 미국, 로큰롤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전이다. Fox는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여러분은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됐군요. 하지만 여러분의 아이들은 그걸 사랑하게 될 겁니다"라고 말한다.

Fox가 연주한 곡은 Chuck Berry의 'Johnny B. Goode'으로 실제 발표 연도는 1958년이다. 예언 같은 영화 속 Fox의 대사는 이 곡을 시작으로 로큰롤이 미국을 지배하게 됐음을 알려준다. 이후 로큰롤은 대중음악의 대세가 됐고, 더 나아가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도구로 여겨졌다. "배운 것은 없지만 기타 연주는 끝내주는 소년"이라는 노랫말은 Berry 자신을 가리킨다. 'Johnny B. Goode'은 Berry의 성공담으로 읽히기도 한다.
Berry는 1926년 10월18일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노예의 손자였지만 자수성가하며 미국 사회에 잘 적응했다. 아버지 Henry는 성공한 목수였고, 어머니 Martha는 당시 흑인 여성으로서는 매우 드물게 대학까지 나왔다. Berry는 세인트루이스 근교지역에 사는 이 중산층 가정의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교회 성가대원이었던 부모의 영향으로 어렸을 적부터 음악에 관심이 많았다. 시가와 하드블루스 등에 심취했던 Berry는 일찌감치 끼와 재능을 드러냈다. 고등학생 때는 장기자랑대회에 나가 Jay McShann의 빅밴드 스타일 곡 'Confessin' the Blues'을 편곡해 불러 우승하기도 했다.
그의 굴곡진 삶은 고등학생 시절부터 시작됐다. 무장강도죄를 지어 1944년 소년원에 들어갔다. 1947년, 21번째 생일날이 돼서야 나왔다. 이듬해 결혼하며 안정을 되찾았다. 자동차 부품 조립 공장 직원부터 아바트 경비원까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일이라면 뭐든 했다. 미용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열심히 일한 덕분에 2년여 만에 방이 3개 딸린 벽돌집을 살 수 있었다. 지난해 생일 때는 38년 만에 내기로 한 새 앨범 [Chuck]을 근 70년을 해로한 아내 Themetta Suggs에게 바친다고 할 정도로 사랑을 표현하기도 했다. 

1952년 말 건반주자 Johnnie Johnson의 밴드에 합류하며 본격적으로 뮤지션의 길을 따랐다. 이때부터 밴드의 리듬앤블루스 세트리스트에 컨트리 곡들을 더하며 음악의 흑백결합을 꾀했다. 밴드 이름도 Chuck Berry Combo로 바꿨다. Berry의 흑백 콜라보에 관객들의 경계선도 무너졌다. 그는 타고난 큰 손으로 기타를 능수능란하게 주무르며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몰아넣었다.

< Muddy Waters >

Berry는 1955년 Muddy Waters의 권유로 시카고에 있는 리듬앤블루스 레이블인 체스레코드를 방문한다. 여기서부터 성공가도가 시작됐다. 사장인 Leonard, Philip Chess 형제는 싱글곡 발매를 제안했다. Berry는 오래된 컨트리 넘버 'Ida Red'를 새로 다듬어 그 해 8월 싱글을 내놓는데 이 곡이 바로 'Maybellene'이다. 리듬앤블루스 차트 정상을 찍었고 빌보드 팝차트에서도 5위에 올랐다. Berry는 하루 아침에 국민적인 스타가 됐다. 

이후에도 'Roll Over Beethoven', 'Rock and Roll Music', 'Sweet Little Sixteen', 'Johnny B. Goode', 'Back in the U.S.A.'까지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했다. TV쇼는 물론이고 유명 라디오 DJ Alan Freed와 함께 영화 "Rock Rock Rock!"(1956년), "Go, Johnny, Go!"(1959년)에도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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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ry의 스타덤도 잠시 쉬어가는 시기가 있었다. 1959년 12월, 성매매를 목적으로 14살 미성년 소녀를 국경을 넘어 데려온 혐의로 경찰에 체포됐다. Berry는 공연지인 멕시코 후아레스에서 만난 소녀를 자신이 운영하던 클럽에서 일하게 했다. 하지만 이 소녀가 나중에 호텔에서 성매매를 하다 경찰에 적발됐다. 소녀는 Berry가 자신을 강제로 성폭행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Berry는 모든 혐의를 부인했으나 1961년 수감돼 20개월 형기를 살다 1963년에 나왔다. 

세상 밖에는 그를 흠모해마지 않는 새로운 세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국에선 Beach Boys가, 영국에서 날아온 밴드 중에는 The Beatles와 The Rolling Stones가 Berry의 곡을 커버하며 그가 스타덤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줬다. Berry는 1964년 무대에 복귀해 'You Never Can Tell'과 'Nadine' 등을 다시 히트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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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인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브리티시 인베이전을 주도한 새로운 세대들이 음악판을 주도하자 공연에 집중하면서 대중적인 스타덤에서는 점점 멀어져 갔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 다시 로큰롤 붐이 일고 1972년 라이브곡 'My Ding-a-Ling'으로 차트 1위에 올랐다. 행실과 별개로 로큰롤의 전설로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Berry는 1979년 탈세로 3개월 감옥생활을 했고, 1989년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하던 여종업원이 Berry가 자신을 몰래 촬영했다며 고소해 체면을 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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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Berry의 위상이 쉬이 추락하지 않는 건 순전히 탁월한 작품 덕분이다. Berry는 뛰어난 연주는 물론 송곳처럼 날카로운 노랫말로도 칭송 받았다. 그의 가사는 서정보다 서사를 중시했으며, 군더더기 없는 적확한 비유로 유명했다. 일례로 'You Never Can Tell'은 채 스무개도 안 되는 단어들로 당시 미국 신혼부부들의 생활상을 포착해냈다. "그들은 시어스 로벅에서 산 물건들로 방 2개짜리 아파트를 꽉꽉 채웠어. 냉장고는 전자레인지에 데우기만 하면 바로 먹을 수 있는 음식들과 진저에일로 가득하지."
그의 노랫말에는 유머가 넘쳤으며 때로는 다양한 해석을 낳기도 했다. 록평론가 Dave Marsh는 Nina Simone이 재해석하기도 했던 'Brown Eyed Handsome Man'은 "Brown SKINNED Handsome Man"으로 읽힐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Johnny B. Goode'의 가사에 등장하는 루이지애나의 시골소년은 백인이 아닐 수도 있다며 Berry의 자전적 이야기로 봤다. Aerosmith의 기타리스트 Joe Perry는 이런 Berry의 가사에 감동해 그를 "로큰롤계의 Ernest Hemingway"라고 극찬했다. 그런 Berry가 떠났다. 록 역사의 한 페이지는 그렇게 끝났다.
박효재

경향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