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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러시아 무기 사겠다는데도 터키 못 버리는 미국, 왜?

미국이 러시아산 방공미사일 시스템 S-400를 구매하려는 터키와 갈등하고 있다. 미국은 F-35 스텔스 전투기 부품 인도를 잠정 중단하는 보복 조치를 꺼내들었지만 터키의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S-400 구매를 공식화했다. 그런데도 미국이 터키를 강하게 제재하지 못하는 배경이 주목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프 푸틴 대통령과 만나 악수하고 있다. 모스크바AP연합뉴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날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리 계획을 포기하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지만 S-400 도입에 대한 로드맵을 확정했다”면서 “이는 우리 주권의 문제이고 우리가 계약을 체결한 이상 도입 사업은 완료된 것”이라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은 “S-400 이외에도 양국이 협력하는 무기사업이 추가로 남아 있다”고 밝혔다. 

 

터키는 S-400 4개 포대를 25억달러(약 2조8000억원)에 구매하기로 했으며, 러시아는 첨단 무기 개발 사업에 터키 방산기업의 대규모 참여를 약속했다. 양국은 러시아 남부에서 흑해 해저를 지나 터키로 연결되는 가스관 사업 ‘터키 스트림’과 터키 최초의 원전 건설사업에 대해서도 논의하는 등 경제협력도 강화한다는 계획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회원국인 터키의 러시아 무기 도입은 회원국 자격 박탈 사유가 될 수도 있다. 미국 록히드마틴의 F-35 스텔스 전투기를 도입할 예정인 터키가 S-400를 운영하면 러시아에 군사기밀을 노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일 스텔스기 부품 인도 중단 조치는 이런 배경에서 이뤄졌다. 하지만 미국은 터키의 나토 회원국 박탈 여부 등 다른 제재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오히려 미 국방부는 터키가 S-400 구매를 철회하고 미국산 지대공 미사일 요격시스템 ‘패트리엇 PAC-3’를 구매한다고 할 경우 부품 인도를 재개하겠다고 밝혔다. 

 

패트릭 섀너핸 미 국방부 장관대행은 스텔스기 부품 인도 중단 조치 발표 다음날인 2일 S-400 구매를 둘러싼 터키와의 대립 상황을 낙관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터키 국방장관과 자주 대화를 나눴다”면서 “나는 미국의 전략적 파트너인 터키와 현재 상황을 잘 해결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특히 패트리엇 PAC-3 판매 제안과 관련해 “가용성과 가격 측면에서 (판매되리라고) 매우 자신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은 2일 “예정대로 S-400를 7월에 도입하겠다”며 바로 미국의 기대를 저버렸고, 8일 푸틴 대통령을 만나 이를 재차 밝혔다. 이슬람 수니파가 다수인 터키는 시아파 맹주 이란의 영향권 안에 있는 시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미사일 요격시스템 구축에 대한 열망이 강했다. 그러다 2015년 시리아 영토를 통해 자국 영토에 들어온 러시아 전투기를 격추한 이후 방공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터키는 지난해까지만 해도 패트리엇 PAC-3 구매를 선호했지만 미국이 끝내 기술 이전을 거부하고 러시아가 더 낮은 가격을 제시하자 S-400 구매로 결심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터키의 이 같은 행보에도 미국이 강한 제재 조치를 꺼내들지 않고 있다. 미국의 중동·아프리카 전략에서 터키의 지정학적 가치가 높기 때문이다. 터키 이스탄불 보스포루스 해협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반도 병합 당시 핵심 전력인 흑해함대의 서진을 막는 위치에 있다.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놓은 터키 남부 아다나주 인지를릭 공군기지의 전략적 가치는 더욱 크다. 내전과 이슬람국가(IS) 격퇴전 과정에서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 시리아를 바로 위에서 압박할 수 있다. 이란의 지원을 받는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무장정파 하마스 견제도 가능하다. 인근 동맹국 이스라엘을 보호하기에도 최적의 위치다. 

 

미국이 터키를 포기하지 못하리라는 자신감을 바탕으로 에르도안 정부가 미국을 압박하고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터키는 쿠르드족 분리주의 세력과의 연계를 경계하며 미국의 IS 격퇴전 파트너인 시리아 내 쿠르드민병대를 언제든 칠 태세다. 시리아 주둔 미군 철군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에르도안 정부는 쿠데타 주동 인물이라며 재미 이슬람학자 펫훌라흐 귈렌의 송환을 요청했지만 미국이 거부하자 이후 미국인 목사 앤드루 브런슨을 쿠데타 협력 혐의로 구금하며 기싸움을 벌였다. 

 

하지만 에르도안 정부는 브런슨 목사 구금 사태 이후 미국으로부터 관세폭탄을 맞으며 리라화가 폭락하고 물가와 금리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등 경제난을 겪었다. 그 여파로 지난달 지방선거에서 최대도시 이스탄불과 수도 앙카라, 이즈미르 등 3대 도시를 모두 야당에 내줬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는 “그럼에도 에르도안 대통령은 2023년 대선을 염두에 두고 서방에 굴복하지 않는 강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꽤 오랫동안 기싸움을 벌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에르도안은 터키 공화국의 근간인 세속주의에서 벗어나 이슬람 색채를 강화하며 대도시 외곽지역에서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