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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월드피플]43년 전 사건으로 다시 법정에 선 ‘자칼’

2000년 11월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 파리|AP연합뉴스

2000년 11월28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법원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 파리|AP연합뉴스

1970~1980년대 시도 때도 없는 테러로 유럽을 공포에 떨게 만든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67)가 13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 법정에 다시 섰다. ‘자칼’이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라미레스 산체스는 43년 전인 1974년 파리의 한 쇼핑센터를 수류탄으로 공격한 혐의로 다시 재판을 받았다. 이 사고로 2명이 숨지고 34명이 다쳤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이날 법정에서 사법부가 시오니스트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며 비난했다고 프랑스 언론들이 전했다.

그는 모든 혐의를 부인하면서, 혁명이라는 이름으로 그동안의 공격을 정당화했다. 그는 “팔레스타인 저항운동을 하면서 나만큼 많은 사람을 처단한 이는 없다”면서 “나는 싸움의 유일한 생존자”라고 말했다. “어떤 전투에서나 뜻하지 않게 희생자는 나오는 법이고, 그 점은 유감”이라고 덧붙였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미국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면서도, 무고한 시민에게까지 피해를 입히는 알카에다의 테러방식은 프로답지 않다고 비난한 바 있다.

그는 이날 갈색 재킷에 빨간 행커치프로 멋을 낸 옷차림으로 법정에 나왔다. 심리가 시작되기 전에는 웃으며 방청석에 키스를 보내는 여유까지 보였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프랑스 정보요원 2명을 살해한 것을 비롯해, 1982~83년 파리와 마르세유 등에서 4차례 폭탄공격으로 11명을 살해하고 150명을 다치게 한 죄로 두 차례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이번에도 1급살인죄 판결을 받으면 세번째 종신형이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1949년 베네수엘라에서 부유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레닌주의를 추종한 아버지는 세 아들의 이름을 레닌, 블라디미르, 일리치로 지었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쿠바와 러시아, 요르단 등에서 게릴라 훈련을 받고 24살이던 1970년 팔레스타인 좌파 혁명조직인 팔레스타인인민해방전선(PFLP)에 가담했다. 남미 출신이라는 이유로 ‘카를로스’라 불리기도 했다. 그의 첫번째 타깃은 영국 시오니스트연맹을 이끈 유대계 인사인 막스앤드스펜서의 회장 조지프 시프였다. 시프는 영국의 시오니스트연맹 명예부회장으로 유명한 유대계 인사였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1973년 시프의 머리를 겨눠 총을 쐈으나 시프는 살아남았다.

유럽에서 테러리스트로 악명을 떨치게 된 건 1975년 오스트리아 빈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본부 테러를 주도하면서부터다. 그는 70여명을 인질로 잡고 각료 11명을 아프리카로 납치해 거액의 몸값을 받아냈다. ‘자칼’이라는 별명은 언론이 붙여줬다. 라미레스 산체스가 머물던 런던의 아파트 책장에 프레더릭 포사이스의 소설 <자칼의 날>이 꽂혀있는 걸 발견한 영국 가디언 기자가 그런 별명을 붙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소설은 1960년대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을 암살하려는 살인청부업자와 수사관의 대결을 그렸다. 라미레스 산체스는 자칼과 비슷한 행보로 주목받았지만, 정작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뒤에 밝혔다.

그는 각국 경찰과 인터폴의 수사망을 신출귀몰 피해다닌 것으로 더 유명해졌다. 변장과 성형수술, 여러 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 덕분이다. 1991년까지 시리아에 은신해 있다가 수단으로 옮겨갔으나 1994년 체포돼 프랑스로 끌려왔다. 자신을 변호한 프랑스인 변호사 이자벨 쿠탕페르와 2001년 옥중 결혼식을 올려 또 다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지금도 그의 변론을 맡고 있는 쿠탕페르는 이번 재판이 “시간 낭비, 돈 낭비”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