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계

[이라크 난민캠프 동행기]배우 정우성은 없었다···난민대사 정우성만 있었을 뿐

인천국제공항에서 처음 정우성 유엔난민기구(UNHCR) 친선대사를 봤을 때 가까워지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먼저 악수를 건넸지만 말수는 적었다. 이라크로 가는 중간 경유지인 카타르 도하공항에서 다시 만났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건넨 유일한 한마디는 “오는 동안 자리가 불편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인사치레인 줄 알았는데, 지난 5일부터 8일까지 3박4일 난민촌에서 지내는 내내 그는 물었다. 잠은 잘 잤는지, 식사는 괜찮았는지, 아픈 데는 없는지. 누구보다 주변 사람들을 살뜰히 챙겼다. 난민기구 친선대사이기에 앞서 그는 우리 일행의 든든한 리더였다.


6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아르빌 외곽의 쿠슈타파 난민캠프를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높이가 족히 7~8m는 돼 보이는 물탱크를 향해 걸어가더니 사다리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갔다. 그의 일정을 기록하기 위해 동행한 사진기자 호르디 마타와 비디오그래퍼 폴 우도 따라 올라갔다. 정 대사를 졸졸 쫓아다니던 아이들이 꼭대기에 선 그를 향해 “우성, 우성”을 외쳤다. 그는 “이렇게 해야 캠프가 다 보이죠”라고 했다. 그는 내내 낯선 난민촌 경험 속에서 머뭇거리는 기자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어떻게 찍어도 화보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아르빌 외곽의 쿠슈타파 난민캠프에 있는 물탱크 꼭대기에 올라가 난민촌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르빌 | 유엔난민기구 제공

어떻게 찍어도 화보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아르빌 외곽의 쿠슈타파 난민캠프에 있는 물탱크 꼭대기에 올라가 난민촌을 내려다보고 있다. 아르빌 | 유엔난민기구 제공


이튿날 이슬람국가(IS)의 거점 모술과 가까운 북부 함다니야의 이라크 실향민 캠프 하산샴 U3를 찾았다. 아르빌은 치안이 괜찮지만 조금만 시내를 벗어나도 정부군과 IS의 치열한 전투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캠프 맞은편에는 버려진 차들과 폭격으로 검게 그을린 땅이 보였다. 캠프를 관리하는 UNHCR 직원들은 너무 깊이 들어가면 지뢰가 있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거기서도 정 대사는 깊숙이 걸어 들어가 캠프가 잘 보이는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갔다.


“원래 그렇게 겁이 없냐”고 물었다. 그는 “어떤 일을 할 때에는 그 외의 것들을 잘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난민들의 열악한 삶을 알리는 게 그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아직까지도 대다수 한국 사람들에게 난민은 낯선 단어”라면서 “난민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고 했다. “앤젤리나 졸리 빼고 (난민기구 친선대사로서) 나만큼 열심히 일하는 사람 있느냐”고 농담을 하면서 웃기도 했다.


난민들과의 만남은 그에겐 이제 ‘삶’이 됐다. 유엔난민기구 한국대표부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5월. 그해 11월 네팔의 난민촌으로 향했다. 2015년 5월 남수단, 2016년 3월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촌으로 여정이 이어졌다. 꼬박 24시간 가까이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던 적도 있다. 이라크의 난민촌보다 훨씬 더 열악한 곳들이었다. 해마다 6월20일이면 ‘난민의 날’ 행사에 참석하는 것은 물론이고, 난민을 위한 행사라면 뭐든 앞장서 홍보한다.


이라크 난민촌에서는 올해로 3번째를 맞는 한국난민영화제를 홍보하는 영상을 찍었다. 힘들지 않으냐고 묻자 “그래도 이곳 일정은 편한 편”이라고 했다. U3 캠프를 방문했을 때 최고기온이 47도에 이르렀지만 그는 선글라스도 쓰지 않고 돌아다니며 난민 가족들과 일일이 눈을 맞췄다.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 “우성,우성”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운데)가 7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함다니야의 국내 실향민 캠프 하산샴U3에서 만난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함다니야 | 유엔난민기구 제공

졸졸 따라다니는 아이들 “우성,우성”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가운데)가 7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함다니야의 국내 실향민 캠프 하산샴U3에서 만난 아이들과 어깨동무를 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함다니야 | 유엔난민기구 제공




배우 일만 해도 충분할 사람이 왜 이렇게 고된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고달팠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겹쳐보였기 때문이다. 중학생이었던 1986년 그가 살던 서울 사당동 달동네에 포클레인이 들어와 집들을 하나씩 허물었다.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경관정화 작업을 한다고 벌인 일이었다. 그는 “전기가 끊기고 물이 끊길 때까지 버티고 또 버티다 다른 달동네로 이사 가곤 했다”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낭떠러지에 있는 옆집 담장 벽이 무너져 우리 집이 세상에 그대로 드러났을 때는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고 했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의 소년은 누가 보고 있지 않은데도 너무 창피했다고 한다.


나중에 성공하면 재단을 만들어서 남을 도와야지, 하면서 미리 재단 이름까지 생각해놨다고 했다. 아이재단, 우리말로 아이라는 뜻 외에 영어로는 나, 중국어로는 사랑한다는 뜻을 가진 이 낱말이 제일 그럴 듯하게 여겨졌다. 그는 “내 주변 사람들과 조그만 것이라도 나누는 활동을 하겠다는 뜻으로 이런 이름을 생각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어느 순간 그 꿈들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난민기구의 제안이 들어왔다. 국제기구의 친선대사라는 타이틀이 주는 압박감에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하겠느냐’는 생각으로 받아들였다. 몸도 고단하지만, 때때로 너무 감정이 이입돼 힘들 때가 많다고 한다. 지난해 3월 레바논의 시리아 난민촌에서는 페이스북 라이브 방송을 하다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시리아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캠프 안에서도 새 생명들이 태어났다. 당시 그는 캠프 안에서 8개월 된 아기를 안아 보았다. 분유를 탈 물조차 데울 수가 없어 제때에 먹이지 못하고, 기저귀가 귀해 자주 갈아 주지 못하는 부모의 얘기를 들었다. 그는 “우리에겐 너무나 쉽고 당연한 일이 이들에겐 너무나 힘든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면서 “그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까지 떠올라 눈물이 났다”고 말했다.


난민들의 간절한 눈빛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오른쪽)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아르빌의 쿠슈타파 난민촌에 사는 도시난민 히디르(오른쪽에서 세번째) 가족을 만나 사진을 찍고 있다.  아르빌 | 유엔난민기구 제공

난민들의 간절한 눈빛 - 정우성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오른쪽)가 지난 6일(현지시간) 이라크 북부 아르빌의 쿠슈타파 난민촌에 사는 도시난민 히디르(오른쪽에서 세번째) 가족을 만나 사진을 찍고 있다. 아르빌 | 유엔난민기구 제공


아르빌에서 가장 마음이 아팠을 때는, 어떻게든 캠프 바깥에서 주민들에 섞여 살아보려 했다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캠프로 들어가겠다고 신청한 가족들을 만났을 때였다. 정 대사는 “그 가족들의 눈빛이 잊혀지지 않는다”면서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찾으려는 절박한 의지가 읽혀서 안타까웠다”고 말했다. 선천적으로 귀가 들리지 않는 데다 IS의 폭격으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10세 소녀 후다 얘기를 하면서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가 생각하는 난민기구의 가장 큰 역할은 세계의 관심을 촉구하고 난민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그는 어느 가정을 찾든 아이들에게 꿈이 뭐냐고 물었다. 아이들이 가장 많이 되고 싶어 하는 직업은 교사였다. 그는 이렇게 풀이했다. “이 아이들은 한국 아이들처럼 좋은 대학에 가거나 취업하기 위한 스펙을 쌓으려고 공부하는 게 아니다. 그저 자기 주변에서 본 좋은 어른의 모습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교사이기 때문이다.”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는 의사, 부조리를 세상에 알리는 기자를 꿈꾸는 아이들도 유독 많다. 난민들을 도울 좋은 방법이 없겠냐는 물음에, 그의 대답은 매우 간단했다. “난민을 위해 기부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