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전 이탈리아 총리가 지난 1월 한 방송국 토크쇼에 출연해 웃고 있다. 로마|AP연합뉴스
섹스파티, 세금탈루 등 온갖 부정부패 의혹을 받다 탈세 사기 유죄 판결로 2013년 상원의원에서 물러났던 이탈리아 전직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1)가 정치판을 다시 주무르고 있다. 다음달 4일(현지시간) 치러지는 총선을 앞두고 고조되고 있는 반난민정서를 이용해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최근 여행가방에서 토막시신으로 발견된 18세 이탈리아 소녀를 살해한 범인으로 나이지리아 난민이 지목되면서 난민 반대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지난 3일 중부 소도시 마체라타에서 아프리카 출신 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이탈리아인의 보복총격이 벌어지면서 극우는 더욱 결집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가 이끄는 우파연합에는 난민 추방을 주장하는 극우정당 동맹당, 이탈리아형제당(FDI)이 있다. 이들 정당 지도부는 난민 총격사건의 발단은 나이지리아 난민의 잔혹범죄 때문이라면서 난민 추방을 더욱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도 “60만 난민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사회적 폭탄”이라면서 난민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극우결집의 효과는 바로 나타나고 있다. 5일 안사통신에 따르면 30% 초반에 머물던 우파연합 지지율은 약 37%다. 사실상 과반정부를 구성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40%를 향해 가고 있다. 중도좌파 집권 여당인 민주당은 물론 반난민을 기치로 내건 포퓰리스트 정당 오성운동에도 8%포인트 이상 앞선다. 단일정당 지지율로는 오성운동이 가장 앞서지만 이들과 연정을 맺겠다는 정당이 등장하지 않고 있어 이대로 간다면 베를루스코니의 우파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 마체라타 난민 총격범인 루카 트라이니 측은 그에 대한 응원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하는 등 반난민정서는 실제 눈으로 확인되고 있다는 점도 우파연합에는 호재다.
집권 민주당을 이끌고 있는 마테오 렌치 전 총리는 루카 트라이니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며 베를루스코니를 견제하고 있다. 총선 후 대연정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정치적인 수사일 뿐 베를루스코니의 중도우파 정당 전진이탈리아(FI)와 연대 가능성은 언제든 열려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FI와 민주당이 공공의 적인 오성운동을 견제하려면 극적으로 손잡을 수도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관건은 반난민정서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 것이냐에 달려 있다. 난민 관련 베를루스코니의 입장은 오락가락하고 있다. 극우정당과 연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강경한 입장이 아니었다. 베를루스코니는 선거 전에는 난민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밝혀왔지만 집권 뒤에 펼친 정책은 이와 많이 달랐다. 베를루스코니 정부 시절 난민에 대한 본국송환률은 대체로 낮았다. 이탈리아 내무부 집계에 따르면 베를루스코니가 총리로 재직했던 2002년 미등록 이민자에 대한 사면이 통계작성 이후 가장 많았다.
지난 5일에도 난민들을 시한폭탄이라고 비유한 지 얼마 안 돼 발언을 번복했다. 베를루스코니는 트라이니의 흑인 총격을 두고 “고립된 사람이 저지른 비정치적 광기”라고 거리를 뒀다. 난민들을 본국으로 추방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과반정부 수립의 열쇠를 쥐고 있는 베를루스코니가 여론을 봐가며 극우와 중도좌파 민주당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베를루스코니는 언제든 우파연합 연정을 깰 수 있다고 밝혔다. 우파연합의 한 축인 FDI 대표 조르지아 멜로니는 베를루스코니가 선거 후 자신들과의 약속을 깰 수 없다는 것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오는 18일 수도 로마에서 시위를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베를루스코니가 극우에 연정 확답을 주지 않는 이유는 이탈리아 국내의 반난민정서가 오래 갔던 사례가 없기 때문으로 보인다. 페루초 파스토레 국제유럽이민연구포럼 이사는 폴리티코 기고에서 반난민정서는 유입 난민수와 비례하지 않으며 휘발성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지중해 등을 통해 이탈리아에 들어온 난민수는 2014년 17만명으로 급격히 증가한 이래 현재까지 60만명에 달한다. 난민을 위협으로 인식한다는 비율은 지난 1월 40%로 유입난민이 2만500명에 불과했던 2007년 11월의 51%보다 오히려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2007년 루마니아 출신 불법체류자가 로마에서 이탈리아 여성을 잔인하게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반난민정서는 최고조에 달했다. 이탈리아 당국은 전과가 있는 루마니아 출신 이민자들을 추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듬해부터 반난민정서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해 2012년에는 난민을 위협으로 느낀다는 비율이 2007년 대비 절반수준인 26%까지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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