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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트럼프, 왜곡된 믿음과 신념 사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혼란과 분노에 빠졌다. 무슬림을 잠재적인 테러리스트로 보고 입국조차 막은 조치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트럼프는 지난달 27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7개국 국적자의 입국을 막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이들 나라는 미국 내에서 테러를 저지를 가능성이 높은 국가로 분류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부에서도 위험국가로 분류돼 해당 국적자들의 입국이 제한된 적이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테러 요주의 인물들을 대상으로 했을 뿐 트럼프 정부에서처럼 그 나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입국을 막지는 않았다.



아이러니한 점은 1975년 이래 미국 내 테러로 사망한 사람들 중에 이번 행정명령으로 입국이 금지된 7개국 국적자가 저지른 테러로 인한 사망자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실질적으로 미국에 테러로 위협을 가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연합(UAE) 국적자들은 입국 금지 국가 명단에서 빠졌다. 약 3000명의 사망자를 내며 최악의 테러로 기록된 9·11 테러는 사우디, UAE 국적자들의 소행이었다. 사우디 왕실이 테러를 저지른 알카에다를 지원했다는 증언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반이민 행정명령의 타당성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포린폴리시, 블룸버그통신 등 미국 언론들은 앞다투어 트럼프가 무지와 왜곡된 믿음, 극단적인 거래주의로 세계를 혼란과 분노로 몰아넣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의 포트워스 공항에서 시리아 출신인 히샴 야신과 아내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억류됐다가 풀려난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다. 히샴의 어머니 나자 알샤미에는 시리아를 떠나 공항에 도착한 뒤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 AFP연합뉴스

미국 텍사스주 댈러스의 포트워스 공항에서 시리아 출신인 히샴 야신과 아내가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억류됐다가 풀려난 어머니를 끌어안고 있다. 히샴의 어머니 나자 알샤미에는 시리아를 떠나 공항에 도착한 뒤 구금됐다가 풀려났다. / AFP연합뉴스


무슬림은 공공의 적

트럼프의 이슬라모포비아는 종파를 가르지 않는다. 트럼프는 시아파가 다수인 이란을 위험한 국가로 묘사하며 중동에서 영향력 확대를 두려워한다. 2일 트위터에 이란의 미사일 실험을 비난하면서 “이란은 미국이 수조 달러를 허비하고 떠난 이라크에서 재빨리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고 썼다. 하지만 이란은 중동 이슬람국가 중 유일하게 IS 테러가 없는 나라다. IS, 알카에다 같은 수니파 극단주의와는 더욱 거리가 멀다.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국가 안보를 자문했던 콜린 칼 조지타운대 교수는 <포린폴리시> 기고에서 이런 이란을 입국 금지 대상 국가로 지정한 것을 두고 “이슬람 국가 출신 부모에서 나고 자란 자녀들까지 극단주의 세력, 적과 내통하는 트로이의 목마로 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트럼프 정부의 국가안보보좌관인 마이클 플린조차 모든 형태의 이슬람주의를 ‘암’으로 묘사했다. 캐슬린 맥파랜드 국가안보 부보좌관은 “메시아를 앞세운 사악한 무리들의 대중운동”이라며 거들었다.



트럼프의 이슬라모포비아는 실질적인 테러 세력은 구분하지 않은 채 기독교 대 이슬람의 대결구도로 몰고 가기도 한다. 그는 지난해 12월 19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벌어진 독일 베를린 트럭 돌진 테러가 나자마자 낸 성명에서 “IS와 다른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이 계속 기독교도를 학살한다”고 했다. 테러범은 잡히지도 않고 독일 당국도 신중한 반응을 보이는 가운데 나온 성명이었다. 나중에 테러범으로 밝혀진 아니스 아므리는 튀니지 출신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IS 조직원 다수가 튀니지 국적이지만 트럼프 정부는 반이민 행정명령 대상국에 튀니지를 포함시키지 않았다.



1일 블룸버그통신은 트럼프의 해외 사업체 지도를 제시하면서 그가 반이민 행정명령을 시행하면서도 자기 사업체가 있는 나라들은 잘 챙겼다고 지적했다. 입국 금지 대상국에서 제외된 UAE와 이집트에도 트럼프의 사업체가 있다. 트럼프는 대선 당시 연방선거관리위원회(FEC)에 이집트에 사업체 2개를 가지고 있다고 재산을 신고했다. UAE에서는 트럼프 골프장이 개장을 앞두고 있다.



트럼프의 극단적인 거래주의는 다른 나라와의 외교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달 28일 트럼프와 통화한 맬컴 턴불 호주 총리는 면박을 당했다. 이날은 마침 트럼프가 반이민 행정명령을 시행한 첫날이었다. 트럼프는 턴불이 전임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합의한 난민 교환협정 이행을 확인해달라고 요구하자 “그건 최악의 협상이었다”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는 “내가 오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4개국 정상과 통화했는데, 당신과의 통화가 최악이었다”고 말했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전했다. 트럼프는 당초 1시간으로 예정된 통화를 25분 만에 끝내고 끊어버렸다.



지난해 오바마 정부는 나우루와 파푸아뉴기니에 있는 호주의 역외 난민 수용시설에 수용된 난민들을 받아들이고, 호주 정부는 미국이 코스타리카에 수용한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 미 정부가 받아들이기로 한 난민들은 대부분 무슬림으로 약 1250명이다. 트럼프는 1일 트위터에 “오바마 정부가 호주에서 불법 이민자 수천 명을 받아들이기로 합의했다니 믿어지느냐. 이 바보 같은 협상을 좀 알아봐야겠다”고 적으며 협상을 파기할 수도 있다는 뜻을 내비쳤다. 하지만 미국 언론들은 군사·안보 정보를 공유하며 대테러전의 중요한 파트너인 호주 정상까지 을러대고 협박한 태도는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7일 버지니아주 알링턴에 있는 국방부에서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7개국 국적자들의 입국을 막는 행정명령에 서명한 뒤 이를 들어 보이고 있다. / UP연합뉴스


전방위 경제전쟁 선포

반이민 행정명령의 실질적인 책임자로 지목받는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가 ‘경제 민족주의’로 표현한 중상주의, 보호무역주의 기조는 세계 각국과 경제전쟁을 예고하고 있다. 트럼프는 지난달 31일 백악관에서 7개 글로벌 제약업체 최고경영자(CEO)들과 만난 자리에서 “중국과 일본이 시장에 개입해 자국 통화가치를 떨어뜨려 미국과의 교역에서 이익을 취하지만 우리는 바보처럼 보고만 있다”고 말했다. 트럼프 정부의 무역정책을 총괄하는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도 이날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유로화는 사실상 독일 마르크화와 같다”며 “독일이 크게 저평가된 유로화를 활용해 미국은 물론 유럽연합(EU) 교역국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환율을 조작하는 중국에서 만든 제품에 45%의 보복관세를 물리겠다고 선포한 데 이어 전통적인 우방국에게까지 경제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포린폴리시>는 트럼프 정부의 미국 우선주의를 ‘비도덕적 거래주의’로 규정하면서 외교질서의 혼란까지 초래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트럼프는 아무리 미국적 가치에 부합하는 철학과 신념을 보이는 국가라도 미국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포린폴리시는 이런 관점에서 러시아와의 관계 재정립이야말로 트럼프 정부에 가장 큰 이익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와 측근들은 러시아야 말로 이슬람 극단주의는 물론 중국과 맞서는 데 필요한 동반자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리아의 독재자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원하는 러시아와 손잡고 시리아 내전을 해결하겠다는 자세는 자칫 더 큰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

<박효재 경향신문 국제부 기자 mann616@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