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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정리뉴스]첩보영화? '러시아-트럼프 파일' 사건의 재구성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11일(현지시간)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당선 후 처음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욕 |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11일(현지시간) 뉴욕 트럼프타워에서 당선 후 처음으로 연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뉴욕 | AP연합뉴스

“제임스 클래퍼가 나한테 전화를 걸어서 불법적으로 돌아다니는 그 보고서는 거짓말과 공상으로 쓰여졌다고 했다. 수상쩍고 정말 나쁜 이야기들로만 만들어졌다면서 말이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12일(현지시간)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러시아가 성매매 동영상 등 자신의 약점을 쥐고 흔들려 했다는 보고서가 실은 가짜라는 걸 클래퍼 미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확인해줬다는 것이다.



클래퍼 국장의 말은 달랐다. 그는 전날 트럼프가 정보당국이 언론에 보고서를 흘려서 실망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트럼프에게 “브리핑한 자료는 정보당국이 직접 작성하지 않았고, 믿을 만한 지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고 강조했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정보의 신빙성이 확인되지 않았다고만 했을 뿐 거짓말이라고 하지는 않았다.


트럼프는 12일 트위터에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러시아가 트럼프에게 불리한 정보를 가지고 흔들려 했다는 보고는 거짓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고 썼다.

트럼프는 12일 트위터에 제임스 클래퍼 국가정보국(DNI) 국장이 러시아가 트럼프에게 불리한 정보를 가지고 흔들려 했다는 보고는 거짓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고 썼다.

미국 언론들은 10일 트럼프에게 불리한 자료를 러시아 정보당국이 가지고 있으며, 이를 가지고 모종의 거래를 하려고 했다는 보고가 지난 6일 버락 오바마 대통령, 의회 지도부 등에게 올라갔다고 보도했다. 2쪽 분량으로 요약된 기밀보고자료는 미 정보당국이 수집한 정보로 만든 게 아니다. CNN은 전직 영국 비밀정보국(MI6) 요원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보고서가 작성됐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미 정보당국의 자료 입수 경위를 자세히 설명했다.


▶러시아, ‘약점 파일’ 쥐고 트럼프와 거래했나


이에 따르면 지난해 공화당 경선 당시 트럼프의 경쟁후보쪽에서 먼저 움직였다. 이들은 워싱턴의 사설조사업체 퓨전지피에스에 트럼프의 약점이 될 만한 정보들을 알아봐달라고 의뢰했다. 퓨전지피에스는 다시 영국 런던에 있는 오비스비즈니스인텔리전스란 회사에 일을 맡겼다. 이 회사는 전 MI6 요원으로 1990년대 러시아에서 일한 적이 있는 크리스토퍼 스틸이 만들었다.



스틸은 외교관 신분으로 러시아와 프랑스 파리에 주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은퇴 후 국제축구연맹(FIFA) 부패사건에 대한 정보를 미 연방수사국(FBI)에 제공했으며 이 사건으로 능력을 인정받아 트럼프 파일 정보 수집을 의뢰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들은 스틸이 언론보도로 신분이 노출되자마자 영국 남부 서리주에 있는 자택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고 보도했다. 데일리메일은 스틸이 이웃에게 기르던 고양이를 맡기고 떠났으며 그의 집은 불이 켜진 채로 발견됐다고 전했다.



스틸 측은 지난해 8월 그동안 수집한 정보를 FBI에 전달했다. FBI가 추가조사를 할 줄 알았지만 두 달 동안 아무런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스틸은 10월 말 비영리 탐사보도 언론 ‘마더존스’를 통해 트럼프 관련 자료가 있다고 밝혔다. 마더존스는 베테랑 첩보원이 FBI에 러시아 정부가 트럼프를 지원하고 있다는 내용의 정보를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이 소식은 상원 군사위원장인 존 매케인의 귀에 들어갔다. 매케인은 스틸이 작성한 문건을 입수하려고 유럽의 모 공항에 밀사를 파견했다. 밀사는 지시받은 대로 파이낸셜타임스를 들고 있는 남성을 찾았고 자료를 받았다. 매케인은 지난달 9일 FBI 코미 국장을 독대하고 자료를 넘겨줬다. 이를 토대로 FBI와 중앙정보국(CIA) 등이 총 35쪽 분량의 보고서로 만들었다. 지난 6일 제임스 코미 FBI 국장을 비롯해 클래퍼 DNI 국장 등 정보기구 수장들이 트럼프와 오바마 대통령, 민주 공화 양당 지도부 등에 관련 보고서 내용을 브리핑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참고 자료로 정보의 신빙성은 아직 확신할 수 없다고 밝혔다.


영국 가디언은 그동안 자료를 받아놓고도 움직이지 않던 FBI가 이를 보고한 것은 대선기간 트럼프를 지원하려했다는 의혹을 해명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FBI가 트럼프의 최측근이자 전직 연방검사 출신인 루디 줄리아니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어 트럼프의 뒤를 봐준다는 의혹을 의식했다는 설명이다.


러시아 정보당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5년 전부터 지원해왔다는 내용이 담긴 기밀 보고 문서. 버즈피드

러시아 정보당국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려고 5년 전부터 지원해왔다는 내용이 담긴 기밀 보고 문서. 버즈피드

러시아 출신의 독립 탐사보도 저널리스트 안드레이 알렉시예비치 솔다토브는 보고서에 몇몇 오류가 보이지만 러시아 정보당국의 활동양상과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고 설명했다. 무엇보다 크렘린의 의사결정 방식을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했다. 보고서는 러시아의 대외 정책이 푸틴 개인의 판단에 따라 결정되는 것처럼 기록했는데 대체로 맞다고 평가했다. 


솔다토브는 러시아가 2014년 3월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강제병합한 이후 이런 경향은 강화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후 시리아 사태 결정 등에 있어서도 외교부는 들러리만 서고 있으며 대외정책은 갈수록 변덕스러워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많은 전문가들은 미국 민주당 해킹이 조세도피처 폭로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 때문이라고 보는데 이 또한 타당한 분석이라고 봤다.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 푸틴이 직접 지시했을 것이란 설명이다.



크렘린이 서구 국가들을 흔들기 위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해커그룹들을 고용했다는 보고 내용은 신빙성이 있다고 했다. 러시아가 책임소재를 불분명하게 하려고 해킹을 아웃소싱하고 있다는 것이다. 솔다토브는 러시아가 사이버 공격의 효용성을 깨닫고 2000년대 중반부터 이런 공격을 자주 벌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크렘린이 KGB(옛 국가보안위원회)의 전술을 많이 따라하고 있다고 적었다. 일단 외국인이 러시아로 들어오면 자국 정보원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를 본다는 것이다. 2013년 미스유니버스 대회 개최때문에 러시아로 들어왔을 때 약점을 잡으려고 했던 이유는 그를 정보원으로 포섭할 수 있을지 가늠해보려는 일종의 테스트라고 분석했다. KGB에서는 이를 지칭하는 용어가 따로 있으며 푸틴은 KGB요원으로 일할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몇년 간 이 임무를 수행했다고 설명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상대방의 약점을 쥐고 흔드는 전략은 러시아에서 1990년대 후반부터 사용됐다고 한다. 크렘린은 첩보기관과 정경유착으로 큰 재벌들인 올리가르히가 확보한 도감청 자료들을 언론에 흘려 정적들의 얼굴에 먹칠을 했다. 2000년대부터는 서구 외교관들을 포함한 정적들의 민망한 동영상을 국영방송에서 틀고 친러시아 매체에 마구 뿌려댔다.



솔다토브는 보고서가 사실과 다른 부분도 있다고 지적했다. 힐러리 클린턴 측 정보를 수집한 것으로 지목된 러시아 연방보안국(FSB) 내 ‘K부서’는 도감청, 사이버 행적 뒷조사 등의 업무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최근 러시아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이 부서는 주요 스캔들에 연루된 관료들의 은행업무, 자금조달 기록 등을 감독하는 일을 한다고 설명했다. 내무부에 또 다른 ‘K부서’가 있는데 이곳이 사이버 행적 뒷조사를 하는 곳이라고 바로 잡았다. 또 보고서에서 미국 대선 대응 전략을 짠 사람으로 지목된 이고르 지브예킨은 러 정부에서 국내 선거 관련 업무를 맡았던 인물로 이번 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봤다. 지브예킨은 지난해 미 대선이 열리기 한 달 전 국가두마(하원) 내 기구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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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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