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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뉴스깊이보기]국회의장은 왜 판결문을 찢었나...3권분립마저 해체한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대법원이 의회의 입법권한을 법원이 대신할 수 있다고 판결한 30일(현지시간), 홀리오 보르헤스 국회의장이 “쓰레기 같은 판결”이라며 대법원 앞에서 판결문을 찢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베네수엘라 대법원이 의회의 입법권한을 법원이 대신할 수 있다고 판결한 30일(현지시간), 홀리오 보르헤스 국회의장이 “쓰레기 같은 판결”이라며 대법원 앞에서 판결문을 찢고 있다. 카라카스|AP연합뉴스

베네수엘라 정부가 장악한 사법부가 민주주의 국가의 기본원칙인 3권분립 정신을 저버리는 결정을 내놨다. 대법원이 우파 야권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의회의 입법권한을 법원이 대신 수행하도록 하는 결정을 내렸다고 30일(현지시간) 엘우니베르살 등 베네수엘라 언론들이 전했다.


이날 대법원은 국회의원들이 계속해서 법원의 결정을 경멸한다면 고등법원이 의회의 입법활동을 대신하도록 하는 등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야당이 지난해 8월 선거법 위반으로 정직된 의원 3명을 취임하게 한 것을 경멸이라 한 것이다. 우파 야권 연합인 민주연합회의(MUD)는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가 사법부를 이용해 독재정권으로 가는 마지막 단계에 왔다고 비난했다. 우파 정부가 들어선 페루는 베네수엘라 정부에 반대하는 의미로 자국 대사를 초치했으며, 미주기구(OAS)는 이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긴급회의를 소집했다. 미국 국무부는 “베네수엘라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후퇴시키는 조치”라고 비난하면서 정치적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즉각 선거가 치러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마두로 정부는 거꾸로 야당이 장악한 국회가 경제를 살리려는 법안을 모두 부결시키면서 국정운영을 방해해왔다고 주장했다. 이번 대법원 결정은 의회가 국영 석유기업이 민간기업과 설립한 합작사의 설립 인가를 거부한 다음에 나왔다. 홀리오 보르헤스 국회의장은 “쓰레기 같은 판결”이라며 대법원 앞에서 판결문을 찢었다. 보르헤스는 “이제는 마두로가 국회”라면서 정부를 향해서도 비난을 쏟아냈다.


이같은 대립은 이미 2015년말 총선 때부터 예견됐던 일이다.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부터 마두로까지 좌파 정부가 17년간 집권하면서 사법부는 친좌파 성향 인사들로 채워졌다. 하지만 지난 총선에서 MUD가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가져가 여소야대가 되면서 정부와 사법부 대 의회의 극한대립은 계속돼왔다. 



야권은 그동안 극심한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 살인적인 물가상승률 등 마두로의 실정을 지적하면서 대통령 퇴진을 주장해왔다. 지난해 10월에는 MUD 주도로 곳곳에서 마두로 사퇴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그달 20일 국민소환투표 청원서명 수집활동이 선거관리위원회에 의해 중단되자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것이다.


국민소환투표는 전체 유권자의 20% 이상의 서명을 받은 뒤 선관위 검증에서 유효한 것으로 판단하면 실시된다. 하지만 선관위는 청원서명 수집 과정에서 일부 부정행위가 포착됐다면서 이를 중단시켰다.


야권은 1월10일 이전 국민소환 투표로 마두로를 탄핵해 조기 대선을 치르기 위해 박차를 가해왔다. 마두로의 6년 대통령 임기 중 절반을 넘기는 이날 이후 투표가 이뤄질 경우 그가 물러난다고 해도 같은 당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돼 좌파정권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야권은 선관위 조치가 국민소환투표를 지연시키려는 수작이라며 강도 높게 비난했으나 선관위가 제동을 걸면서 결국 1월10일 이전 국민투표는 물건너 갔다.


마두로 퇴진 요구를 불러온 경제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저유가 기조가 계속되면서 베네수엘라 화폐인 볼리바르의 가치는 곤두박질쳤다. 시장에서는 지폐를 세는 대신 무게를 재서 계산하는 게 일상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물가상승률이 1660%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정부는 지난해 12월 경제 위기를 타개하려고 화폐개혁을 실시했지만 국민들의 원성만 샀다. 구권 사용을 막아놓고는 신권을 늦게 배포해 혼란을 가중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카라카스 등 6개 도시 시민들은 휴지 조각이 된 100볼리바르를 뿌리며 정부의 실정을 비난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마두로는 이 때도 야당 의원들이 폭력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며 책임을 돌렸다. 하지만 정부는 그달 15일 한시적으로 구권 통용을 허락하면서 비난 여론에 무릎을 꿇었다.


살인적인 물가상승률과 겹친 식량난, 생필품 부족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는 국민들의 생필품 구매를 위해 콜롬비아와 국경을 수차례 열어주기도 했다.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대와 가톨릭중앙대 등이 지난 2월 실시한 국민생활실태조사 결과, 국민 4명 중 3명은 식량 부족으로 몸무게가 최소 8.6㎏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고 UPI 등 외신들이 전했다. 93%는 현재 수입으로 식비를 감당하기 힘들다고 답했다. 경제난과 식량 부족때문에 체중이 줄어드는 국민들이 늘면서 ‘마두로 다이어트’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졌다. 지난해 식량 수입량은 2015년의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정부는 국민들에게 직접 농산물을 재배해 먹으라고 권할 정도였다.


국가 부도 우려는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외환보유액보다 갚아야할 빚이 더 많다. 지난해 10월 기준으로 외환보유액은 109억달러였다. 저유가 기조로 외환보유액은 더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데 올해 안으로 갚아야 할 돈은 110억달러에 달한다. 경제위기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 마두로 퇴진 요구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