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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김정남 살해 계기로 본 '대사관의 용의자들'

말레이시아 수사당국이 김정남 살해 용의자로 지목한 북한인들 중 4명은 이미 평양으로 돌아간 것으로 보이며, 나머지 중 2명은 쿠알라룸푸르 주재 대사관에 은신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지 경찰이 북한 대사관 서기관이라고 밝힌 현광성과, 고려항공 직원 김욱일이다.


지난달 23일 칼리드 아부 바카르 말레이시아 경찰청장은 현광성에게는 외교관 신분에 따른 면책특권이 있어 체포영장을 발부할 수 없지만 고려항공 직원인 김욱일에게는 체포영장을 발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사관은 치외법권 지역이어서, 이들이 대사관에 숨어 있다면 제 발로 걸어나올 때까지 사실상 체포할 방법이 없다.

치외법권 지역임을 이용해 세계의 대사관에 은신한 범죄 용의자들은 이들 외에도 여럿 있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2일 말레이시아 당국의 수사가 북한대사관때문에 가로막히고 있다며 외국 대사관을 피난처로 삼았던 인물들을 소개했다.

1989년 파나마에서 미군에 붙잡힌 마누엘 노리에가

1989년 파나마에서 미군에 붙잡힌 마누엘 노리에가

치외법권 지역으로서 대사관의 지위는 1961년 ‘외교관계에 관한 빈협약’에 따른 것이다. 하지만 이후 대사관은 외교적인 사안과 상관없이 중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도피처로 사용돼왔다. 파나마의 독재자 마누엘 노리에가가 대표적이다.

노리에가는 미국에서 마약 밀매, 돈세탁을 한 혐의 등으로 1989년 파나마를 침공한 미군에 체포되지 않으려고 바티칸 대사관으로 숨었다. 하지만 대사관은 노리에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열흘 만에 미군에 투항하도록 했다. 당시 미군이 노리에가를 대사관 밖으로 끌어내려고 대사관 주변에 설치한 대형 스피커로 밴드 건즈 앤 로지스의 ‘웰컴 투 더 정글’ 같은 시끄러운 록음악을 틀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줄리안 어산지가 2016년 5월, 아이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아기고양이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 @embassycat

줄리안 어산지가 2016년 5월, 아이들로부터 선물로 받은 아기고양이와 함께 놀고 있는 모습. @embassycat

폭로사이트 위키리크스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는 영국 런던 주재 에콰도르 대사관에서 5년째 머무르고 있다. 어산지는 2010년 위키리크스를 만들고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과 관련된 미 정부의 기밀문서 수십만 건을 폭로했다. 하지만 어산지가 대사관에서 피신생활을 하는 이유는 국가기밀 누설때문이 아니다. 어산지는 2011년 스웨덴에서 두 여성을 각각 성추행, 성폭행한 혐의로 체포영장이 발부돼 도망자 신세가 됐다.

어산지는 2012년 6월 영국 런던의 에콰도르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스웨덴 검찰은 어산지의 신병인도를 요구했지만 에콰도르 정부는 미국 등 제3국으로 추방하지 않는다고 보장하면 스웨덴 송환에 협조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 때문에 스웨덴 검찰이 지난해 11월 에콰도르 대사관에 어산지에게 할 질문을 서면으로 작성해 전달하고 대신 심문을 진행하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었다.

에콰도르 대통령 선거에서 우파 야당 기회창조당(CREO)의 후보로 나선 기예르모 라소는 어산지를 대사관에서 추방하겠다는 이색 공약을 내기도 했다.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주장하며 사법처리를 피해가려는 움직임도 있다. 2011년 미국 뉴욕 맨해튼의 한 호텔에서 여직원을 성폭행하려다 현지 경찰에 체포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도 면책특권을 주장했지만 소용없었다. IMF는 직원들에게 외교관에 준하는 면책특권을 보장한다.

하지만 당시 IMF는 공식업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스트로스칸을 옹호하지 않았다. 또 기소됐을 때는 이미 IMF 총재 직위가 박탈된 때라서 면책특권을 주장할 수도 없었다.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전 IMF 총재

외교관 신분인 현광성은 북한이 그의 면책특권을 스스로 해제하지 않는 이상 말레이시아 경찰이 체포해 조사할 수 없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북한과 외교관계를 단절해 북한대사관이 폐쇄되면 김욱일은 물론 현광성도 체포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가능성이 낮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현광성을 ‘외교상 기피인물(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로 선언해도 북한으로 추방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드물긴 해도 자국 외교관의 면책특권을 포기하는 경우도 있다. 말레이시아 정부는 2014년 뉴질랜드에서 21세 여성을 성폭행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던 외교관 모하메드 리잘만 빈 이스마엘에 대한 면책특권을 포기했다. 1997년 조지아 정부도 미국 메릴랜드주에서 음주운전으로 16살 소녀를 치어 사망하게 한 혐의를 받았던 외교관 구오르기 매카라지의 면책특권을 철회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이 말레이시아 경찰 수사에 계속 협조하지 않고 이로 인해 양국 관계가 계속 악화되면 북한만 손해라고 지적했다. 신문은 말레이시아에 북한사람 약 1000명이 살고 있으며, 북한 기업들은 이곳에서 글로벌 시장과 접촉하고 국제 금융시스템을 이용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누리고 있다고 전했다. 하지만 말레이시아인들이 북한에서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곤 무비자 입국정도다. 하지만 이마저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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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재 기자 mann616@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