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최근 각국 정부와 기업에 중국 최대 통신장비업체 화웨이로 핵심 부품을 공급하지 말라고 강하게 촉구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중국과 무역전쟁을 벌이는 이유이자 핵심인 화웨이가 자체 생산 부품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역량까지 갖춰 명실상부 5G(5세대 이동통신) 산업 글로벌 선두기업으로 올라갈 시간적 여유를 내주지 않으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트럼프 정부의 전략은 성공할 수 있을까.
트럼프 대통령은 영국 국빈방문 이틀째인 지난 4일(현지시간) 영국 정부가 화웨이 기술 사용을 금지하지 않을 경우 향후 양국 간 정보공유에 차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화웨이는 물론 모든 것에 합의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은 5G 장비 중 안보에 위협이 되지 않는 비핵심 부품은 자국 기업이 화웨이에 팔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이다. 미국은 영국이 화웨이와 5G 사업 관련 모든 거래를 중단하길 바란다. AFP통신 등 외신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영국 방문 전부터 화웨이 제재에 관한 양국 정부의 이견 조율이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와 더불어 주요 안건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 대통령이 영국 방문 중 재차 화웨이 제재 동참을 언급한 이유는 스마트 기기의 핵심 부품 공급을 막아 화웨이 완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구상에 영국 기업이 참여하느냐가 결정적이기 때문이다. 영국 ARM은 모바일 기기의 두뇌 역할을 하는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원천기술을 화웨이·애플 등 스마트폰 제조사와 퀄컴 등 반도체칩 제조업체에 팔아 수익을 낸다. 화웨이를 비롯해 애플의 아이폰, 삼성전자 갤럭시 등 전 세계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AP의 95% 이상이 ARM의 반도체칩 설계도를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자국의 지식재산권 기술과 이를 활용해 만든 부품을 화웨이를 포함, 자회사 등 관련 68개 업체로 수출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정부는 그달 20일 화웨이가 이미 라이선스를 취득한 지재권 기술에 대해서는 90일 동안 임시 라이선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제재를 잠시 미뤄놨다. 하지만 중국과 무역협상이 불리한 국면으로 접어들 경우 언제든 이 제재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표면적으로는 그간 트럼프 정부가 주장해 온 중국의 지재권 기술 절도 행위에 대한 대응 조치다. 하지만 실상은 화웨이의 약점인 미국의 지재권 기술 사용 부품에 대한 높은 의존도를 집중 공략하겠다는 의도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5G 네트워크가 원활히 작동하려면 기지국 등 통신장비, 기지국 신호를 받는 스마트 기기, 이 기기에 들어가는 반도체(모뎀칩·통신용 칩)가 필요하다. 이 모든 요소를 갖춘 기업은 전 세계에서 화웨이와 삼성뿐이다. 화웨이는 핵심 부품인 반도체 제조 기술 역량을 꾸준히 높여왔지만 아직 완제품을 만들 수 있는 단계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화웨이는 미국의 지재권 관련 제재를 우려해 몇 년 전부터 반도체 자회사 하이실리콘을 앞세워 자체 기술을 활용한 부품 생산 비중을 높이는 데 역량을 집중해왔다. 하이실리콘은 시스템반도체 설계와 개발만을 전문적으로 수행하는 ‘팹리스’ 회사로 화웨이 맞춤형 반도체칩 설계에 주력하고 있다. 시장조사기관 ABI리서치에 따르면 화웨이의 자체 기술이 가장 집약된 제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 2018년 스마트폰 모델 ‘P20 프로’의 경우 하이실리콘이 설계해 만든 반도체칩 비중은 27%다. 미국 반도체 회사 생산 비중은 7%에 그쳤다. 중국 내 경쟁 통신장비업체 ZTE(중싱)의 미국 반도체 제품 사용 비율이 대부분 50%를 넘기는 것에 비하면 매우 낮은 수치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는 화웨이가 글로벌 통신장비업체로 성장하면서 하이실리콘의 매출도 2013년 20억달러(약 2조3570억원)에서 지난해 79억달러로 5년 새 4배 가까이 뛴 것으로 집계했다.
트럼프 정부는 화웨이의 자체 생산 역량 강화의 첨병인 하이실리콘을 지재권 사용 규제로 묶어둔다는 계획이다. 하이실리콘은 여전히 미국의 케이던스·시놉시스 등 반도체 설계·검증 소프트웨어(EDA) 업체 의존률이 높다. 이들 미국 기업이 하이실리콘에 제공하는 지재권 기술은 차세대 통신용 칩 개발에 필수적이다. 미 상무부가 지난달 검토했던 지재권 사용 제품 수출 블랙리스트에 하이실리콘 포함이 확정될 경우 화웨이에는 타격이 불가피하다. 영국 ARM까지 트럼프 정부의 제재 국면에 동참하면 AP 원천기술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중국이 해외 각국의 반도체 제조사, 스마트폰 업체 제품 구매의 큰 손인 만큼 이들 기업들이 트럼프 정부의 화웨이 압박에 협조할지는 미지수다. 시놉시스는 투자자설명회에서 트럼프 정부 방침에 따르겠다고 밝힌 반면 케이던스는 입장 관련 답변을 거부했다고 월스트리트저널은 전했다. ARM 중국 지사는 법 위반 요소가 있는지 검토해봐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중국 상무부는 미국 상무부의 수출 블랙리스트 발표 이후 중국 기업으로 공급망을 교란시키는 단체와 개인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작성하겠다며 맞섰다.
영국을 제외한 독일·프랑스 등 유럽 동맹국들은 트럼프 정부의 일방적인 화웨이 제재에 동참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특정 국가를 상대로 과학기술 분쟁이나 무역전쟁을 벌이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면서 “우리는 화웨이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기업에 대해서도 봉쇄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미국은 아시아 동맹국들 설득에 나섰다. 패트릭 섀너핸 국방장관 대행은 1일(현지시간)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화웨이를 미국과 동맹국들 모두에 안보위협으로 지목하면서 공동 대응을 촉구했다. 중국 정부가 요청할 경우 기업들이 해당 정보를 공유하도록 한 법을 언급하며 “화웨이는 정부와 너무 가깝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국 시민들의 개인 정보와 국가 안보 정보가 신뢰할 수 없는 네트워크에 유통되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태국 영자지 아시아타임스는 트럼프 정부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군사위협을 경계하는 아시아 동맹국들을 반화웨이 전선에 끌어들이려는 의도라고 지적했다.
화웨이 제품에 부품을 조달하는 공장 역할을 하고 있는 일부 아시아 국가들은 중국과 경제적으로 긴밀히 연결돼 있어 트럼프 정부의 반화웨이 드라이브에 동참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2017년 기준 중국 스마트폰 전체 부품의 16%가 말레이시아·싱가포르, 33%가 대만에서 생산된 것으로 집계됐다. 이들 3국에서만 중국 스마트폰 부품의 절반 가량이 만들어진 셈이다.
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위탁 생산) 업체인 대만의 TSMC는 화웨이 납품 계획을 변함없이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말레이시아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는 지난달 30일 일본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도쿄에서 연 ‘아시아의 미래’ 국제포럼에서 “미국이 화웨이를 공격하는 것은 화웨이가 가장 첨단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면서 “화웨이 기술을 가능한 한 많이 사용하겠다”고 말했다. 싱가포르 리셴룽 총리는 지난달 31일 샹그릴라 대화 개막연설에서 “미국과 중국 모두 약소국에게 줄 세우기를 강요하지 말라”고 말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의 삼성을 언급하면서 미·중 무역전쟁의 불똥이 두 나라 모두에 소비자를 둔 아시아 국가 기업들에 튀었고, 이들은 불가능한 충성심 경쟁에 내몰렸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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