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한복판에서 72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렌펠타워 화재 사건의 희생자 가족과 생존자들이 11일(현지시간) 미국 법원에 소를 제기했다고 밝혔다. 이날 희생자 69명의 가족들과 부상자 177명이 미국 기업들도 화재에 책임이 있다며 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민사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미국 언론들은 영국에서 일어난 화재 책임을 미국 법원에서 따지는 것은 이례적이라면서 힘든 싸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원고측 변호인 제프리 굿맨은 지난주 소를 제기했다고 밝히면서 “사건은 해외에서 벌어졌지만 참사를 초래한 결정은 이곳 미국에서 이뤄졌다”고 말했다. 화재에 취약한 외장재와 내부 절연재, 폭발한 냉장고를 만든 미국 회사들에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굿맨은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본사를 둔 외장재 제조사 아코닉, 영국 회사지만 펜실베이니아주 말번에 미국 지사를 둔 절연재 회사 셀로텍스, 미시간주 벤튼하버에 본사가 있는 냉장고 제조업체 월풀이 소송 대상이라고 설명했다.
그렌펠타워 화재는 2017년 6월14일 새벽, 건물 저층에서 냉장고가 폭발하면서 시작됐다. 저가의 알루미늄 패널 외장재로 마감한 건물 외벽은 순식간에 불길을 꼭대기 24층까지 옮겼다. 심야에 화재가 발생한 데다 불길이 너무 빠른 속도로 번지는 바람에 피해가 커졌다. 특히 건물에 쓰인 외장재가 미국과 일부 유럽연합(EU) 국가에서는 금지된 제품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조사 아코닉을 비난하는 여론도 거셌다. 사고현장에서 발견된 월풀 냉장고 뒷부분이 미국에서 팔리는 제품과 달리 철제가 아니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번 소송은 미국 법원이 영국 법원에 비해 원고 친화적이고 기업들에 더 강하게 책임을 묻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고려한 행동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영국 법원은 기업 책임배상 소송시 피해자들의 상태를 사고 이전으로 복구시키는 ‘회복적 정의’라는 원칙에 기반해 판결을 내리는 반면, 미국 법원은 기업의 법준수를 촉구하기 위해 징벌적 피해배상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피해자들 입장에서 소송 승리의 관건은 미국 회사의 결정이 얼마큼 결함제품을 만드는 과정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밝혀내는지에 달렸다. 하지만 이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아코닉의 외장재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졌고, 셀로텍스의 절연재는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월풀의 냉장고도 유럽 국가들에서 제조된 것이다. 원고 측은 이들 회사들이 자사 제품이 얼마큼 불이 잘 붙는지를 파악하고 있었는지, 관련 성능 테스트 결과를 조작하지는 않았는지, 미국에 팔지 않는 제품을 왜 다른 나라들에 판매했는지를 검토해보겠다는 계획이다.
크리스토퍼 프렌치 펜실베이니아주립대 로스쿨 교수는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소송이 어느 나라에서 진행되는지 결정할 수 있는 판사들의 재량권이 진상 규명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프렌치 교수는 “기업이 영업활동을 벌이는 나라 어디서든 소송이 진행될 수 있다”면서 “판사는 어느 국가에서 소송을 진행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지 판단하기 위해 소송에서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기업 내부 자료 공개를 강제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피소 사실이 공개된 뒤 해당 기업들은 모두 소송 관련 코멘트를 거부했다. 아코닉은 성명을 통해 영국 화재 원인 조사단의 활동을 지지한다고 밝히면서도 소송 관련 대응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셀로텍스도 조사단이 요구하는 관련 자료들을 다 내놓으며 협조하겠다는 입장이다. 월풀은 소송 관련 코멘트는 거부하면서도 사고 현장에 있었던 자사 냉장고 모델에서는 어떤 결함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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